나름 모든 것들이 구비되어있는 것 같은 유니온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함으로 만들어진 피아노가 하나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 존재를 잘 몰라, 조율을 위해 가끔 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손을 대는 사람들이 없었던 피아노, 흑백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뉜 건반들을 무심하게 눌러보았다.
달칵, 하며 피아노의 건반을 덮던 덮개가 올려지고, 적당한 거리로 의자를 떨어뜨려놓은 뒤,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재즈풍의 음악이 공간을 메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이 들렸다. 클래식을 편곡한 것 같은 음계였다. 적당한 세기, 그리고 고요함, 그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변주가 들어갔다. 재즈의 흔한 기법으로, 사뭇 어두워질 수 있는 음을 밝은 곡조로 바꿔둔다.
“로빈, 차라리 작가나 카페 사장이 낫지 않을까.”
“은퇴하고 하라는 거 아니면 다 거절이야.”
얼핏 그리운 낯이 보인다. 사관생도라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 따뜻한 낯이었던 너, 차분히 웃으며 저와 대화를 했던 그의 모습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목소리만 떠오를 뿐. 마치 이런 곡조와도 같던 사람.
“하하... 거절하지는 마, 작가도, 카페 사장도, 군인도 어울려. 하지만 군인보다는 작가가 더 어울려.”
“생각해볼게.”
뒤늦게야 깨달았던 그의 마음을 회상한다. 편지 너머로 전해졌던 말들, 애정들, 사랑들. 모든 것이 마비된 듯 느껴지지가 않았다. 깨어난 뒤, 모든 것을 정리했음에도 그 편지만은 버리지 못한 내가 있었다. 모든 것이 전소했음에도, 남겨지는 미련이라는 것이 있었다. 너는 은자처럼, 고요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너는 내가 내어주는 한 켠의 자리를 원했다. 나는 깨닫는 것이 늦었고, 너는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난 긴 애도를 해야 했다. 애도가 끝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가슴 한 켠에 남는 어떠한 것이 그를 보내주지를 못했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가야 했던 것처럼. 그 시절의 너를 애도하기 위해 덧씌운 너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이제야 괜찮아졌음을 안다. 더 이상 너라는 그림자가 필요없어짐을 알았다. 이제야 깨닫고, 이제야 알았다.
곡이 끝났다. 패달을 떼어내고, 다시금 건반을 덮는다.
미처 사랑했었노라 대답 못했던 그를 이제야 보내주었다. 너무 늦은 미련을 이제야 놓아주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사랑했어, 미안해. 이제 가 봐. 라고, 청중이 없는 곳에서 그렇게 입을 떼었다.
이제야 괜찮아졌다. 긴 장례의 끝, 길고 길었던 애도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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